문화 변화 : 경제학자들이 연방준비제도이사회를 운영하는 시대가 곧 막을 고할 것인가?

  • 28 Mar 2017
  • By Bluford Putnam and Erik Norland

재닛 옐런 박사의 미국연준 이사회 의장 임기가 2018년 초에 끝납니다.  옐런 박사가 다시 지명되어 향후 4년간 의장직을 연임할 가능성도 있지만, 워싱턴 D.C.의 분위기를 볼 때, 민간 기업 출신이 연준의 의사봉을 잡는 시나리오도 상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망은 의장직에 그치지 않습니다.  연준 이사회에는 3개의 공석이 있으며, 2018년 여름에는 새 부의장이 취임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것은 7인 이사회 중 5석이 신규 이사로 교체될 수 있으며, 그중 일부 또는 전부가 학계나 중앙은행 출신이 아닌 민간 기업 경력자들로 채워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경우, 연준에는 큰 문화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변화는 금리 정책 결정 방법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저희는 연준 이사회에 경제학자는 줄고 기업 경력자들이 더 많이 포진하게 되면 연준의 초점이 통화 정책의 학술적 해석에서 벗어나 금리와 부채 간의 상호 작용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예상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의 높은 부채 부담이 정상 시보다 낮은 금리를 선호하는 편향성을 초래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는 채무 상환 부담이 경제 회복에 찬물을 끼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일 것입니다. 장기적으로 이 시나리오가 유지되면 인플레이션 대비 저금리 편향성이 미국 달러화의 약세를 가져올 가능성이 큽니다. 이 주제에 대한 Blu Putnam의 팟캐스트를 시청하시려면 다음 페이지를 방문하십시오. www.cmegroup.com/podcasts/off-the-charts-podcast-series/what-will-a-post-yellen-fed-look-like-in-2018.html.

경제학자 이전의 시대 – 연준의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

컬럼비아 대학의 Arthur Burn 교수가 이사회 의장에 임명된 1970년부터 경제학자들이 연방준비은행을 운영해 왔습니다.  그러나 시계추가 경제학자들의 반대편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는 저희의 시나리오를 이해하려면 연준의 초창기 운영 방식에 관련된 맥락과 역사적 배경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연방준비은행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상대적 독립성을 얻는 과정에서 기업인과 금융인들의 공로가 컸습니다.

미국 연준은 1913년 연방준비제도법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하지만 1935년 은행법이 제정되면서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연준은 최종대출자의 소명을 수행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실제로 대공황을 초래한 1929년 주식시장 붕괴에 대한 책임의 상당 부분이 연준의 몫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시 연준이 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를 막는 데 필요한 대출과 유동성을 제공하지 않고 은행을 폐쇄한 것이 대공황을 야기한 원흉이었다는 비난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배구조의 대대적인 변화가 요구됐습니다.  연준 창설 당시, 지역 은행 총재들(당시는 Governor, 1935년 이후엔 President라 칭함), 특히 뉴욕 연방준비은행의 총재가 가장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1920년대 연준은 뉴욕 연방준비은행의 초대 총재인 Benjamin Strong Jr.가 사실상 운영했습니다.   Strong 총재는 은행가로서 여러 직급을 거치며 Bankers Trust의 사장에 오른 후, 새로 창설된 뉴욕 연방준비은행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불행하게도, Strong 총재가 1928년 10월 세상을 떠났고, 1929년 가을 주식시장 붕괴 발생 시점에 연준에는 리더십이 결여된 채, 거대한 권력 공백이 발생했습니다.  Strong 총재의 효과적인 지도력이 사라진 상황에서 연준은 은행의 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를 중단시키고 금융 시스템을 지원하는 데 필요한 긴급 조치를 취하기 위한 컨센서스를 도출할 수 없었습니다.

1935년 은행법의 통과로 지역 연방준비은행 총재들의 권한은 크게 축소되고 워싱턴에 기반을 둔 연준 이사회의 권력이 막강해졌습니다.  1936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Marriner Eccles를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새로운 이사회 의장으로 임명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동안 4년마다 그를 의장에 재임명했습니다.  Eccles 의장은 대공황기에도 살아남은 Eccles-Browning 계열사 은행들을 설립하고 운영하며 큰 성공을 거둔 화려한 경력의 은행가였습니다.

미국이 대공황 국면에서 벗어남에 따라 핵심 과제는 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데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재무부와 연준은 전쟁 비용을 지급하는 데 필요한 막대한 부채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미국 국채 금리를 0.375%로 유지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수백만 명의 병사가 민간인 생활로 복귀하는 가운데 경제가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인플레이션이 급상승했습니다.  Eccles는 연준 의장으로서 저금리를 유지하는 것에 반대하며 연준의 독립성을 요구했습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이에 분노해 Thomas B. McCabe를 새로운 의장을 지명했습니다.  Eccles의 이사 임기는 만료되지 않았던 상태여서 그는 이사회에 머물며, 2차 세계대전의 막대한 비용에 대한 연준의 통화 발행 책임을 면하기 위해 연방준비은행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습니다.  신랄한 논쟁이 벌어졌으며 트루먼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 재무부와 타협안을 마련하기 위해 백악관에서 연방 공개 시장위원회 회의를 소집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로 연방준비은행의 독립성을 회복시킨 "1951년 협정"이 나왔습니다. 

이 협정이 체결된 직후, 재무부의 핵심 브로커로 나섰던 William McChesney Martin 재무부 차관보가 더욱 강한 권력과 독립성을 지닌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Martin은 탁월한 금융시장 경험을 보유한 전형적인 인문학도였습니다.  Martin 의장은 영문학과 라틴어를 전공한 예일 대학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몸속에 연준의 피가 흐르는 인물이었습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연준 창설을 가능하게 한 1913년 연방준비제도법 초안 작성을 Martin의 부친에게 맡겼고, Martin의 부친은 훗날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 총재를 역임했습니다.  아들 Martin은 주식 브로커로 일했고 뉴욕증권거래소의 이사를 거쳐 의장직을 역임한 후에 1951년 연준 의장직에 올랐습니다.  Martin은 트루먼,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 닉슨 등 5명의 미국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의장직을 연임하면서 독립적인 연준의 막강한 전통을 구축한 장본입니다.

연준 문화의 변화1970년대에 경제학자들의 시대 도래

1970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콜럼비아 대학의 Arthur F. Burns 교수를 연준 의장으로 임명했습니다.  그 후 잠시 기업가 출신인 G. 윌리엄 밀러가 1978년 3월 8일부터 1979년 8월 6일까지 잠시 의장직을 맡은 후, 카터 대통령이 볼 볼커를 의장으로 임명했습니다.   볼커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하고 하버드 대학원과 London School of Economics 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경제학 교수는 아니었지만, 볼커는 경제학 논리와 그 논리를 통화 정책에 적용하는 데 능통했습니다.  볼커에 이어 앨런 그린스펀 박사가 1987년 의장직을 맡게 되었으며 경제 예측의 실질적인 면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리고 2006년 부시 대통령이 MIT를 졸업하고 프린스턴 대학 교수 출신의 벤자민 버냉키 교수를 의장으로 임명했습니다.  현재는 노동경제학 전문가인 옐런 박사가 연준 의장직을 맡고 있으며, 우연하게도 옐런 박사의 남편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입니다.  역사적 관점에서 경제학자들이 연방준비은행에서 거둔 성과는 명암이 엇갈립니다.  그리고 분명히 언급하건대 저는 전문직 경제학자이자 퀀트 분석가로서 경제학자로부터의 중심 이동을 개인적인 감정으로 평가하는 것은 아님을 미리 밝혀둡니다.

번스 의장의 통화 공급량 확대는 1970년대의 고질적인 인플레이션을 허용한 부분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볼커 의장의 연준은 금리를 20%까지 치솟게 해 심각한 경기 침체를 초래했고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린스펀은 1987년 10월 주식 시장이 폭락하자 금리를 인하한 후 1989년에는 금리를 급격히 인상하여 미국 저축은행(Savings & Loan) 위기와 경기 침체를 촉발했습니다.  금리의 급속한 반등과 이후 1994년 봄의 금리 인상은 전 세계 국채의 대대적인 하락 장세를 촉발시키는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그린스펀 박사는 9-11 테러 공격과 주식시장의 기술주 붕괴 후에도 금리를 인하했습니다.  돌아보건대 그린스펀의 연준은 너무 오랜 기간 낮은 수준의 금리를 유지해 주택 붐이 형성되는 데 기여했고 그가 2004년부터 2006년까지 17단계에서 걸쳐 기준금리를 1%에서 5.25%로 인상한 후 주택 경기는 파산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버냉키 의장의 재임기에는 2008년의 금융위기가 발생했고 지저분했던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과 AIG의 긴급구제가 있었습니다.  버냉키 교수는 대공황에 대한 자신의 학문적 연구 이론에 따라 정책을 집행했고, 연준의 대차대조표를 사용해 경기 침체가 공황으로 번지는 것을 막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는 이어 후속 조치로 양적완화(QE) 정책을 통해 이미 경제가 성장세로 돌아선 상황에서 미국 국채와 모기지담보부증권을 매입했습니다.  탄탄한 민간 부문 고용 창출이 자산 가격을 높이고 채권 수익률을 낮춘 시기에 집행된 독특한 통화정책을 활용하여 진행된 버냉키 의장 시절 연준의 실험은 희망했던 것만큼 GDP 성장률이나 인플레이션을 높이는 데 실패했습니다. 

금리 인상은 옐런 의장의 연준에 숙제로 넘어갔습니다.  옐런 의장은 현재 연준 내부에서 무엇이 "중립적"인 금리 정책을 성립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이끌고 있습니다.  현재의 맥락에서 볼 때 긴축도 아니고 우호적이지도 않은 중립적인 정책은 연방 기준금리를 근원 인플레이션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정책인 것으로 보이는데, 연준의 근원 인플레이션 목표는 2%입니다.  따라서 2016년 11월 선거 이후, 옐런 의장의 연준은 2016년 12월과 2017년 3월에 금리를 인상했으며, 금리가 "중립적" 정책의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연준의 역사를 앞으로도 계속 다시 쓸 것입니다.  1951년에 은행가와 기업가들이 얻고자 그토록 열심히 투쟁했던 연준의 정치적 독립성을 돌이켜 보면 경제학자들의 시대가 거둔 성과 역시 명암이 엇갈립니다.   볼커의 연준이 카터의 재선을 위해 단기 금리를 20%까지 인상했다고 비난할 사람은 없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연준이 금리를 너무 급격하게 인상하고 자신이 감독해야 했던 은행 제도 내부의 금융 리스크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해 발생한 1990년대의 저축은행 위기와 2007-2008년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를 둘러싼 그린스펀 의장 시절 연준의 책임을 논할 때도 정치적 동기를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반면, 번스 의장의 연준과 옐런 의장의 연준은 역사가들로부터 비난받을 소지가 있기는 합니다(물론 그러한 해석에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번스 교수가 임명된 1970년 2월의 연방기금 금리는 9%였고, 대통령 선거가 시작된 1972년 봄에는 4%까지 하락했었습니다.  옐런 의장의 연준은 2015년 12월에 첫 0.25% 금리 인상을 발표한 후, 선거 기간 중 금리를 동결했으며, 이후 2016년 12월에 금리 인상 정책을 "중립 정책" 수준으로 다시 인상하는 보다 납득할 수 있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러한 정책 결정에는 많은 비정치적 이유가 있었으므로, 경제학자들이 통화 정책을 주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란을 벌이는 가운데 역사가 여러 번 다시 쓰일 것으로 예상합니다.

연준 문화의 변화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점이 있습니다. 연준 이사회의 구성원이 이번에는 변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시간이 말해줄 것입니다.  저희는 단순히 경제학자들이 연준을 지배하는 시대가 막을 고하는 하나의 시나리오를 검토해 본 것일 뿐입니다.  경제학자들이 계속 연준 회의에서 의사봉을 잡고 있다면 "중립적"인 연방기금 금리 정책과 "자연" 실업률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입니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이 즐겨쓰듯 "다른 한편으로는" 연준 이사회의 무게 중심이 기업인 쪽으로 쏠릴 경우, 이것이 정책에 미치는 잠재적 영향은 어떤 것일까요?

대학 교수 경험이 있고 교수협의회가 얼마나 정치적인지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학계의 정치적인 면모에 놀랄 것입니다.  어쨌든 적어도 어떤 분석가의 글을 읽느냐에 따라 연준의 독립성을 둘러싼 논쟁은 이미 다리를 건넌 상태이기 때문에 저희는 연준이 독립성을 잃지 않을까 걱정하지는 않습니다.  기업 중심적 연준에는 편향성이 있을 수는 있지만,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미국 재무부로부터 연준의 독립성을 얻게 해준 1951년 "협정"을 끌어낸 장본인도 은행가 연합체였습니다.

연준 내부 토론의 본질이 근본적으로 변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학계는 "중립적인 것"이 무엇이고, 금리 정책을 결정하는 적절한 "규칙"이 무엇인지와 같은 질문에 대해 걱정합니다.  기업가들은 많이 다른 주제에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기업가 출신의 연준 이사들은 앞으로 부채에 관해 많이 걱정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저희는 그들이 높은 부채 수준으로 인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업가들은 금리가 인상될 경우, 이미 높은 수준에 이른 채무 상환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비즈니스 세계 출신 기업가로 구성된 연준 이사회가 탄생할 경우, 현재의 경제가 지고 있는 부채 부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금리 인상 속도가 더 늦춰지리라는 것이 저희의 직감입니다.   1990년대의 저축은행 위기나 2007-2008년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를 촉발한 금리 인상 정책을 돌아볼 때, 두 위기 모두 부채에 관련된 위기이며, 이 사건들이 금리 인상은 주의를 요한다는 교훈을 준다는 것이 저희의 시각입니다.  경제학자들은 인플레이션 수준에 따라 결정되는 "중립적" 금리 정책에 초점을 맞출 가능성이 있는 반면, 비즈니스 중심적인 사람은 단순히 금리 인상 시 막대한 미국의 부채 수준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할 가능성이 큽니다.  연준의 이러한 문화적 변화 시나리오가 실현되면 그것이 미치는 영향 중 하나는 강한 달러 시대가 막을 내릴 것이라는 점입니다.   과도한 부채 부담은 과도한 경제 성장을 걱정하기보다는 인플레이션 위험을 감수하도록 유혹을 불러일으킵니다. 따라서 이러한 편향성은 연준으로 하여금 비교적 더욱 우호적인 정책을 취하게 만듭니다.  시간이 말해줄 것이므로 생각할 거리를 한번 던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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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블루포드 "블루" 퍼트넘씨는 2011년 5월 이후 CME 그룹의 전무이사 겸 수석이코노미스트로 재직하여 왔습니다. 블루 퍼트넘씨는 금융서비스업계에서의 35년이 넘는 경력과 중앙은행 관련 및 투자 리서치와 포트폴리오 관리에 관한 해설을 해 오며 CME 그룹의 글로벌 경제상황에 관한 대변인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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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에릭 놀란드는 CME 그룹 상무이사 겸 선임 이코노미스트입니다. 에릭 놀란드는 글로벌 금융시장의 트렌드를 추적하고 경제적 변수를 평가하며 CME 그룹과 그 사업전략 및 동 소속 시장의 투자자들에 대한 영향을 예측하는 경제 분석을 맡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CME 그룹의 글로벌 경제 및 금융상황과 지정학적 상황에 대한 대변인 중의 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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